* 애니 <Avengers Assemble> 시즌1 15화 'Planet Doom' 기반의 2차 창작입니다.
* 닥터 둠(빅터 폰 둠) × 앤서니 토니 스타크 (+클린트 바튼 × 나타샤 로마노프)
* 자유연재
The Victory of God
W. MARTEN
Chapter 2.
방금 전의 폭발로 시민들이 급히 건물 안으로 몸을 피했다. 폭발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며, 그 사람이 생계를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지 왕을 거스르려고 저지르는지 이유조차 모른다. 그에 대해 아는 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폭발범으로 인해 곧 둠봇이 등장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거리 끝에서 순찰을 돌던 경비용 둠봇이 폭발을 감지해 해당 구역으로 날아왔다. 둠봇은 땅에 정착하자마자 메모리에 저장된 매뉴얼에서 지금이 어떤 상황과 맞는지 빠르게 찾아냈다.
[탐지 완료. 결과 : 폭발.]
둠봇은 눈에 장착된 스캐너를 가동해 거리를 훑으며 폭발을 일으킨 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머리를 돌릴 때마다 시민들은 자신들 쪽에 범인이 없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건물 옥상에서 클린트가 상황을 살피며 침착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그는 둠봇의 핵심일 머리를 겨냥하며 바람을 느꼈다. 바뀌는 바람의 세기를 읽으며 화살촉 방향을 조절했다. 마침 좋은 바람이란 생각이 들 때 화살을 쏘았다.
머리에 화살이 꽂히자 둠봇이 경련을 일으켰다. 본체가 전기로 감기더니 강한 열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역시 백발백중이지.”
클린트는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다며 자신을 칭찬했다. 또 다른 임무를 위해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이번에 노려야할 목표는 로봇이 아닌 왕의 머리다.
어서 나와라.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침착하게 둠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렸다. 여태껏 둠은 큰 문제가 생기면 사건 현장에 나타나 그의 힘을 과시했다. 이기지 못할 힘을 본 사람들은 그에게 복종하고 다시는 그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렇게 둠은 공포를 심었고 아직까지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처형한 이들은 판타스틱 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나타나야 할 주인공이 무대에 보이지 않는 대신 둠봇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클린트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단 생각을 했다. 이쯤이면 둠이 나타나야 하는데.
“둠은 이곳에 오지 않아.”
그리운 목소리지만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지 않았다. 이대로 그녀를 보게 된다면 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게 뻔하다.
“그래? 아쉽네. 그 면상에 화살을 꽂아야 하는데…….”
미리 준비해둔 화살이 클린트의 손 안에서 부러졌다.
“멋지게 불로 장식까지 해주었는데 오지 않다니 너무하잖아.”
클린트가 킬킬 웃으며 바닥으로 부서진 것들을 떨구었다. 뒤에서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리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클린트는 나타샤가 자신도 모르는 사람으로 변했기를 바랐다. 그래야 마음 놓고 그녀와 적으로서 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그녀이길 바랐다. 아직 그녀를 잃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타샤를 놓지도 못하고 붙잡지도 못하는 자신이 이렇게 머저리 같을 줄이야.
“항복해, 클린트.”
습관대로 부른 이름은 칼이 되어 심장을 난도질한다. 클린트의 동작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어떤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는 그저 정지된 눈동자 속에 나타샤를 가두기만 했다.
클린트를 체포하기 위해 날아온 둠봇이 가까이 올 즈음이 되서야 사고가 원활하게 흘러갔다. 클린트가 공중제비를 하며 둠봇의 공격을 빠르게 피했다. 나타샤의 냉정한 시선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살짝 흔들리던 눈동자는?
클린트는 그를 목표로 한 미사일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건물 아래로 몸을 던졌다. 둠봇이 건물 밑을 보았을 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감지되지 않습니다.]
나타샤는 그의 뒤를 쫓으려다 그만두었다. 둠의 명령은 무슨 일인지 알아내는 것이지 범인을 잡는 게 아니었으므로 굳이 클린트를 쫓아갈 필요가 없다. 지금 그를 쫓아가봐야 중간에 따돌려질 게 뻔하고. 무엇보다 둠에게서 명령을 받은 이후, 편두통이 생겨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나타샤가 숨을 푹 내쉬며 몸을 돌리려는데 연락용 로봇이 날아와 그녀의 앞에서 멈추었다. 나타샤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긴장하며 홀로그램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예상대로 왕이 파란 홀로그램의 형태로 등장했다.
[내 신부여.]
느낌 탓인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더 차갑게 들린다. 나타샤는 방금 저가 클린트의 뒤를 쫓지 않아 찔려서 그렇게 들린 것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며 둠의 부름에 응했다.
“예, 폐하.”
[스타크가 쉴드의 마지막 은신처를 알아냈다. 지금 장소에 대한 정보를 그대에게 보내줄 테니 그곳으로 가도록.]
“알겠습니다. 헌데, 그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할 말이 끝난 둠은 예고 없이 사라졌다. 나타샤는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로봇이 공중에 띄어준 장소를 보았다. 이전에 쉴드에서 일할 때 가본 적이 있던 장소로 근처 골목까지 꿰뚫었던 곳이다.
결국 내 손으로 인가. 나타샤는 아까 클린트가 그랬던 것처럼 건물 밑으로 뛰어내렸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건물을 디뎠다. 필시 그도 그곳으로 갔을 테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은 전과 많이 다르지는 않다. 저를 보는 눈에 애석함을 담았을 뿐 바뀐 것은 없다. 그가 예전부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한지는 아니까.
“너를 잃고 싶지는 않은데.”
은신처로 가는 동안 쉴드로 연락하는 요원들이 눈에 띠었다. 토니의 해킹기술 덕에 그들의 대화를 도청할 수 있었다. 둠봇 여러 대가 은신처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경고였기에 나타샤는 더 빨리 움직였다. 물론 가는 길에 발견한 요원들은 자동으로 둠봇의 몫이다.
다리 밑에 도착하자 큰 하수구가 보였다. 본래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입구에 이끼가 무성하게 자라 있다. 나타샤는 하수구로 들어가면서 로봇으로 토니에게 연락을 취했다.
“스타크 열 탐지기를 사용해서 안에 몇 명이 있나 미리 확인해줘.”
[알겠어. 또 필요한 건 없어?]
“응.”
[너무 무리하지는 마. 굳이 네가 마무리 지을 필요는 없어.]
토니의 말에 나타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알아. 작게 속삭인 그녀의 목소리가 닿았는지 스피커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요건이 끝난 로봇은 토니가 입력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길을 스캔하며 중추를 향해 날아갔다. 나타샤는 경계심을 놓지 않고 로봇의 뒤를 따라갔다.
가는 동안 벽에 덕지덕지 묻은 핏자국을 손으로 쓸었다. 손끝이 빨갛게 물드는 걸 보니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이 흔적이 입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상처 입었을 사람의 상태를 추측했다. 나타샤는 고개를 들어 복도 끝까지 이어진 붉은 선을 보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혹여 그가 다친 건 아닐까. 만약 그라면 치명상에 도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현재 둠을 모시고 있다. 그는 반란 분자고. 계속 적을 걱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분명히 클린트는 닉과 다른 쉴드 요원들과 함께 중앙에 있을 것이다. 그곳에 헬리케리어가 자리 잡고 있으니까. 현재 쉴드의 수중에 남아있는 마지막 요새. 초기 디자인이 토니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헬리케리어 본체를 손보아 잠입하는 일은 매우 쉽다.
복도 끝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빛을 발견한 나타샤는 상체를 숙이며 잠입준비를 했다. 귀를 기울이며 한 발자국을 조심히 내딛는데 로봇이 빨간불로 신호를 보냈다. 안에 누가 있나 보군. 중앙에 도착하려면 몇 분 더 걸어가야 한다. 나타샤는 머릿속으로 길을 그리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문 너머의 천장에 있는 통풍구를 발견하곤 스크린에 뜬 인원수를 읽었다.
“여섯.”
아직도 쉴드에서 일하는 요원들이 많구나. 의외다. 나타샤는 안으로 들어가 총으로 요원들을 빠르게 죽였다. 그들은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토니가 만들어준 훈련장 덕분에 명중률이 올랐다. 알려주면 뿌듯해할 테니 절대 말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마지막 한 명을 쏘았다.
아쉽게도 심장에서 살짝 비껴갔는지 요원은 곧바로 죽지 않았다. 쓰러진 그는 안간힘을 다하며 나타샤에게 기어왔다. 그가 바닥을 손끝으로 누르며 지나온 길이 피로 진하게 물들어진다. 나타샤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제 발목을 잡으려는 요원의 얼굴을 밟아 더 이상 자신에게 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째ㅅ……”
요원은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전에 만났거나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해 느껴지는 감정은 없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나타샤는 시체를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천장으로 점프해 통풍구를 열었다. 안으로 로봇과 함께 들어가 중앙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았다.
[아아-. 나타샤 잘 들려?]
“적에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광고해주는 것 같네. 잘 들려.”
[그렇게 차갑게 말하면 나 상처 받는데.]
토니가 평소에 보여주던 몸짓이 생각나 나타샤는 픽 웃었다. 가짜 눈물을 훔칠 그를 떠올리는데 로봇이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려주었다.
[지금 네 근처에는 500m 내로는 사람이 감지되지 않아. 조금만 더 가면 헬리케리어가 보일 텐데 그쪽에 대략 20명 정도 있어.]
“벌써 다 스캔한 거야?”
나타샤가 놀랍다는 어투로 말하니 토니는 자연스럽게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자신이 누군데 빨리 해결 못하겠냐는 둥 뭐든지 말하라며 다 들어주겠다는 둥 끊임없이 말했다. 나타샤는 토니의 긴 이야기에 “그래, 그래.”라고 답하며 계속 나아갔다. 평소대로라면 듣지 않고 바로 음소거 버튼을 눌렀겠지만, 오늘은 특별히 끄지 않았다. 누군가가 생각나서 이러는 거라고 얼핏 느껴졌다.
토니가 말이 멈췄을 때 나타샤는 얼마 멀지 않는 곳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통풍구를 열곤 복도로 내려갈 때를 살펴보았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밑으로 몸을 날려 가볍게 착지했다. 들키면 성가시므로 벽에 몸을 붙여 빠르게 이동했다.
헬리케리어 주변을 경비하는 요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2인 1조로 움직이며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상태다. 나타샤는 로봇 렌즈에 그들이 보이게끔 맞추어 토니에게 보여주었다.
“난 처음 보는 디자인인데 본 적 있어?”
[저건 요번에 해머가 만든 아이인데 아직 발표된 적은 없어.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알고 갖고 있는 건지……. 참, 재미있네.]
토니가 헛웃음을 짓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직 사회에 공개가 되지 않은 무기라. 나타샤는 몸을 숙이며 그들이 틈을 보일 때를 기다렸다. 로봇의 스크린에 뜬 무기 설계도를 통해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감이 왔다.
장전한다면 팔을 꺾고 무릎을 찬다. 계획을 C까지 세워두곤 근처로 다가온 요원에게 날렵하게 달려들어 입을 막으며 손목을 틀었다. 손쉽게 제압된 요원은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몸을 틀었지만 제 목에 느껴지는 압력이 무서워 그만두었다. 아직 목숨을 잃고 싶지는 않아 눈물을 흘리며 숨죽였다. 그러나 그에게 까마득한 어둠이 찾아왔다.
스타트. 나타샤는 헬리케리어 너머로 보이는 요원들의 심장을 노려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안에 방탄복을 입어 뚫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만 이건 스타크 작 총탄이다. 현재 출시된 방탄복 중 그의 실험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컥, 헉.”
몸집이 육중하기 때문인지 한 요원이 즉사하지 않았다. 나타샤가 혀를 쯧 차곤 요원에게 바이트를 쏘았다. 그녀는 온몸을 격렬하게 비트는 그를 뒤로하고 헬리케리어의 2번 터빈 쪽으로 달려갔다. 개발자의 말에 의하면 그곳에 들어가기 쉬운 문이 있다. 계단으로 올라가려는데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전에 팀 활동을 할 때 옆에서 듣던 소리다.
“호크 아이.”
“어서 와, 블랙 브라이드. 기다리고 있었어.”
클린트는 나타샤를 겨냥한 화살을 놓지 않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등 뒤에서 총을 꺼내려는 그녀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며 위협했다.
“내가 더 빠를 텐데?”
“그렇겠지. 하지만 해보지 않고는 모르잖아.”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닉이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순간 나타샤의 동작이 멈췄다. 누가? 나탸샤는 클린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쉴드를 나간 이후로 친근하게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이다. 물론 둠과 토니에게서 들은 적은 많지만, 클린트가 직접적으로 언급할 줄은 몰랐다.
나타샤가 천천히 양팔을 올리자 클린트는 잠시 활을 내려두었다. 지금은 싸울 생각이 없나보네. 무슨 생각을 하고 항복 의사를 보인지 모르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뒤에 서서 헬리케리어의 입구로 안내했다.
복도로 들어서니 차가운 시선들이 느껴진다. 나타샤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저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 중에 누구도 없으므로 당당하게 나아갔다.
“……나타샤 나한테 할 말 없어?”
“없어.”
“정말로?”
클린트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걷는 나타샤를 계속 응시했다. 긴 붉은 머리카락이 전보다 윤기가 난다. 잘 살고 있긴 하구나. 차마 그녀의 어깨를 잡을 수가 없어 활만 강하게 쥐었다. 방금 만나기 전까지도 그녀를 본다면 화부터 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말도 없이 쉴드를 등 돌린 그녀가 야속했기에. 그렇지만 초기 스파이 시절부터 계속 나타샤를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이유 없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왜 우리를 배신한 거야?”
“난 배신한 적 없어, 호크아이.”
“하하. 둠의 신부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가 그 녀석의 사람인데 배신이 아니야?”
나타샤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클린트를 보았다. 냉소를 머금은 얼굴 대신 울상이 보인다. 안쓰럽지만 건네줄 말이 없어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이 배신하지 않았다고 그에게 증명해야 할 이유도 없으며 그가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와의 관계는 여기까지이기 때문이다. 전우였지만 더 이상 전우가 아니며 이젠 그와 저 사이엔 신뢰도 없으므로.
그래도 꼭 그에게 단 한 가지는 알려주고 싶어 입을 열었다.
“난 배신하지 않았어.”
클린트는 나타샤가 되풀이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왜 그녀가 둠의 신부로, 둠의 측근으로 활동하는가. 둠은 현대 최악의 독재자인데. 그렇지만 나타샤를 믿는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일을 겪었을 거라 추측하며 문을 열었다.
거대한 스크린 위에서 하얀 점들이 움직인다. 나타샤는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닉을 응시했다. 변하지 않은 모습에 이마를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달라진 게 없다. 바뀐 건 나뿐인가. 원망과 허무가 동시에 느껴진다.
“오랜만이군, 블랙 위도우. 아니, 지금은 블랙 브라이드지.”
닉이 나타샤와 클린트를 향해 느긋하게 걸어왔다. 환영한다는 듯 양팔을 벌리며 씩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건강해 보이는군.”
“누가 할 소리를.”
클린트는 닉을 매섭게 노려보는 나타샤를 보며 자신이 모르는 둘의 이야기가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 일로 인해 나타샤가 떠났을 지도 몰라. 잠시 고민하다가 무기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화살을 통 속에 다시 넣곤 책상에 걸터앉았다. 서로 날을 세우는 것 보니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다.
“……그때 그런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었어.”
“거짓말 마시죠. 다시 같은 결정을 해야 한다면 똑같이 말할 거잖아요.”
쏘아, 라고. 차분한 음성이 클린트의 정신을 붙잡았다. 누가 누구에게. 클린트가 충격 어린 얼굴로 닉을 보았지만 닉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옆에서 따갑게 자신을 보는 클린트에게 눈짓 한 번 주지 않고 나타샤를 응시했다. 지금 경계를 늦추면 목이 잘린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하지만 자네가 지금 둠의 밑에서 일하고 있으니 후회되는군.”
“빨리 죽이지 못 해서요?”
찬웃음에 닉은 약간 서글퍼졌다.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이미 때를 놓쳤다. 과거의 제 짧은 판단으로 인해 나름대로 아끼던 부하 중 하나를 잃었다. 이길 수 없는 적에게 수족을 빼앗긴 느낌이라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도 나타샤를 원망하지 않는다. 책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그녀가 아닌 자신이다.
“……그때 적의 태세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내 불찰이네. 하이드라가 이미 임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지.”
“제 임무는 당신과 몇 요원밖에 몰랐는데요.”
“그래. 그 몇 명 중에 하이드라가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 정확히는 쉴드 내부에……. 아니네.”
닉은 초반부터 망가진 쉴드의 역사를 알려주어도 소용없을 것이란 판단에 입을 닫았다. 상대를 설득시킬 때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굳게 다문 입을 보며 나타샤는 자신이 처형당할 뻔한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적이 저를 죽이기 직전에 닉이 내린 명령도. “쏘아.”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배신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걸까. 아니면 죽은 이후 시체가 되어도 정보를 뽑을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직업 상 수 없이 죽음에 대한 대비를 한다. 그러나 정말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의 명령 때문에 죽는 건 단 한 번도 상상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간 쌓아왔던 신뢰는 쉽게 사라졌다. 닉이 원래 그런 사람임을 알지만 신뢰는 다른 문제다. 당시 닉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저가 배신하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건 여기에 있다. 나타샤 로마노프는 그날 죽었으므로.
지금이 기회야, 나타샤.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타샤의 어깨가 밑으로 쳐졌을 때, 닉의 경계가 조금 풀렸다. 나타샤는 빠르게 충을 뽑아내곤 방아쇠를 당겨 닉의 배에 총을 쏘았다.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공격이라 닉과 클린트가 당황해 하는 사이 닉의 다리를 걸어 그를 바닥으로 넘어트렸다.
눈앞의 총구를 보며 닉은 방금 긴장을 푼 자신을 욕했다. 그녀가 온전히 둠의 사람이 되었는데도 희망을 가진,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멍청하다고.
클린트는 욕을 뱉으며 활을 들었다. 화살촉을 나타샤에게 겨냥하며 그녀가 행동을 무르기만을 기다렸다. 총을 거둘 확률은 낮지만 그녀는 그녀의 사람에게 만큼은 다정한 사람이니 아직 가능성은 있다. 물론 자신들이 그 범위 안에 들어간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긴장감이 흐르는 와중에 문 너머의 복도로부터 비명이 여러 번 들렸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죽는단 사실을 알기에 클린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곧 답을 알 수 있었다.
“안녕, 쉴드 여러분!”
문이 과격하게 열리는 동시에 의외의 남자가 등장했다. 토니 스타크. 닉이 으르렁거리며 자신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자 토니는 활짝 웃어주었다.
“무슨 야생 동물도 아니고 그렇게 이를 보여?”
“여긴 왜 온 거지?”
“당연한 거 아니야?”
쓸어버리려고 왔지. 토니가 손가락을 튕기자 헬리케리어 밖에서 폭발음이 들리더니 본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적의 기세가 기우는 것을 확인한 나타샤는 닉에게 협박했다.
“이제 그만 항복하시죠.”
“……아니. 난 절대 항복하지 않을 거네.”
저를 곧게 바라보는 닉의 눈과 마주하니 방아쇠가 쉽게 당겨지지 않는다. 나타샤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챈 닉이 다리를 움직여 그녀를 넘어트리려했지만, 그 사이 마음을 다 잡았는지 나타샤가 총을 쏘았다. 그녀는 닉의 허벅지에 총알을 박곤 다시 그의 머리로 총구를 옮겼다.
닉이 협박에도 응하지 않아 그의 목숨을 앗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벽이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이렇게 화려하게 등장할 사람은 단 한 명이다. 둠. 나타샤는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가 이곳으로 직접 행차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당황했다.
“젠장.”
닉은 나타샤를 옆으로 밀치고 빠르게 일어났다. 피가 흘러나오는 배를 압박하며 출입구 쪽으로 달렸다. 오늘 지더라도 나중에 다시 싸우면 된단 생각에 살아있을 요원들에게 방송으로 명령했다.
“지금 당장 철수해! 그리고 살아남아라!”
제 갈등으로 인해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다. 나타샤는 바보 같다고 자신을 타박하며 닉에게 총을 쏘려했지만 둠이 한 발 더 빨랐다.
둠이 닉의 목을 잡으며 한 손으로 그를 들어올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컥컥거리는 닉을 무정히 응시했다. 이 남자는 자신에게 지배당하기를 거부한 마지막 존재다. 이런 현명한 자가 부하로 있으면 괜찮기에 한 번의 자비를 주었다.
“복종하면 살려주겠다.”
“하, 절대로 하지 않을 거네. 차라리 죽여.”
“……사실 그대 같은 인물은 공개 처형을 당해야 마땅하지만 네 존재만으로 누군가 헛된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 이곳에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잘 가도록. 뼈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닉의 숨이 멈췄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토니가 닉의 죽음을 확인하곤 둠봇에게 명령했다.
“남은 요원들을 붙잡아.”
클린트는 둠의 손 안에서 명을 다한 닉을 멍하니 보았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 닉이 둠에게 잡힌 순간부터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닉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시간이 멎는 듯했다.
“닉……. 닉!”
클린트가 달려가려는 걸 허겁지겁 달려온 샘이 막았다. 사내에 퍼진 방송을 듣자마자 살아남은 요원들은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났다. 샘은 혹시나 클린트가 아직 안 나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곳으로 달려왔다. 역시 예상대로 그는 탈출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가려는 클린트를 막으며 제 쪽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클린트는 샘의 팔에서 발버둥 치며 닉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닉의 마지막 명령을 기억해주라는 샘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젠장.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래, 마지막 명령. 위험한 적들로 가득한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곳이 있나 빠르게 판단했다.
저기다. 클린트는 화살로 근처 유리창을 깨곤 샘을 데리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중간에 자신들을 공격하는 둠봇을 피하며 밑으로 몸을 던졌다. 샘을 먼저 밖으로 내보낸 후, 클린트가 잠시 나타샤를 바라보았다.
“나타샤!”
분노와 슬픔이 가득 얽혀버린 외침이 퍼졌다. 뒤를 돈 상태라 클린트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어떨지 짐작 갔다. 정말 많이 일그러졌겠지. 나타샤는 슬프게 웃으며 어깨를 곧게 폈다. 그에게 동정 받고 싶지 않다.
잠시 바닥에 쓰러져있는 닉을 보았다. 초점 없는 눈을 통해 피로 물든 자신이 보인다.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야. 조용히 저가 만든 결말을 받아들이며 다시 다짐했다. 이제 자신들은 적대 관계일 뿐이다.
“저 둘을 쫓아가.”
세 대의 둠봇에게 명령하는 나타샤의 곁으로 둠이 천천히 다가왔다. 서로 많은 업무로 바쁜 탓에 오늘 하루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건 지금이 처음이다. 나타샤는 자연스럽게 둠의 손등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 경애하는 왕을 위해 이곳까지 왔다.
“수고했다, 나의 신부여.”
“아닙니다. 제가 이곳을 정리할 테니 먼저 돌아가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둠의 판단으로는 그대가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두통이 있다지.”
네? 나타샤가 놀란 눈으로 둠을 보았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둠은 나타샤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대며 그녀가 원하는 답을 알려주었다.
“스타크가 그대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알려주더군. 왜 아픈 걸 말하지 않았지?”
차갑지만 다정한 손길을 느끼며 나타샤는 살포시 웃었다. 스타크가. 언제 로봇으로 제 건강 상태를 확인한 건지 모르지만 고마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깨질 듯했던 머리가 조용하다. 나타샤는 괜찮다고 고개를 흔들며 제 왕께 아뢰었다.
“빅터 당신의 명이 우선이니까요.”
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나타샤의 긴 머리카락을 귓등 뒤로 쓸어주었다. 그녀의 이마에 제 입술 대신 가면을 대며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앞으론 몸을 아끼도록.”
“분부하신 대로.”
저를 걱정하는 둠의 반응에 나타샤는 클린트를 떠올렸다. 그는 늘 자신이 아플 때는 곁에 있어주었으며, 자신을 극진히 간호했다(임무로 인해서 곁에 없을 때도 있었지만 거의 있어주려고 노력했다.) 그의 정성 어린 태도가 둠이 보여주는 반응과 비교되어서 그런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떠나기 전, 나타샤는 토니와 헬리케리어 시스템 구조에 대해 토론하는 둠을 응시했다.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그러니까 그가 저를 진정 배우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조금 서글퍼졌다.
아파서 평소보다 감성적이 된 것 같다고 자신을 책하며 성으로 귀환했다.
▷▷▷
“스타크. 들어갈게.”
“나타샤?”
아까 보았을 때보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나타샤의 모습에 토니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제 허락을 구하지 않고 침대에 눕는 걸 말리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기꺼이 침대를 빌려줄 예정이다. 그래도 대강적인 이유가 궁금해 나타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베개 속에 파묻은 얼굴을 잘래잘래 흔드는 그녀를 보니 더 걱정된다. 이렇게 약한 모습은 자신이 아는 한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데. 토니가 읽던 책을 덮곤 나타샤에게 다가갔다. 그는 침대에 천천히 앉으며 나타샤의 안색을 살폈다. 눈 주위가 붉게 물들어있다. 이런. 토니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건지 추측이 갔다.
“오늘 네 방에서 자도 돼?”
“상관은 없지만……. 그걸로 괜찮은 거야?”
“응. 별일 아니니까.”
별일 아니긴. 토니가 나타샤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어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의 친절에 나타샤는 슬쩍 미소 지었다.
“정말 괜찮은데.”
“네가 그렇다니까 우선 넘어갈게.”
토니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업무를 보았다. 자비스와 손에 든 태블릿을 이용해 어떤 식으로 무기를 업데이트할지 고민했다. 쓸모없고 비효율적인 디자인과 기술은 가차 없이 휴지통에 버렸다.
일에 집중하는 토니의 등을 보며 나타샤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스파이 활동을 하면서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CEO였던 그를 근처에서 볼 수 있었다. 천재지만 오만한 동시에 배려심이 깊은 남자였고 그래서 그의 어린 면이 더 돋보였다(물론 자신은 직업 때문에 그게 보였지만 남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어리다는 말을 들으면 기겁할 거다.)
다시 본 때는 의외의 순간이었다. 적의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던 자신을 둠이 구해줄 때둠의 곁에 그가 있었다. 왕의 뒤에 서있던 하얀 가운의 남자를 절대 잊지 못한다. 후에 둠이 그가 자신의 충신 중 한 명이라고 소개했을 때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정말 놀랐었다. 저가 알던 그는 절대 누군가의 밑에서 일할 사람이 아닌 누군가를 이끌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변했어. 나타샤는 CEO일 때의 토니와 지금의 토니를 비교하다가 그만두었다. 토니만 변한 건 아니다. 자신도 변했다. 둠의 부하가 되면서 가장 중요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렸다. 자신은 더 이상 블랙 위도우가 아닌 블랙 브라이드니까.
그렇지만. 나타샤는 닉의 죽음을 떠올렸다. 아무리 닦아도 손에 그의 피가 묻은 것처럼 느껴진다. 잊지 못할 제 죄이며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아야 할 정의이기도 하다. 닉은 처음 가졌던 가족이자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 중 한 명이었다. 가끔 그의 무감정한 감상이나 이성적인 답변을 생각하면 ‘그나마’란 수식어도 붙여야겠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붙이지 않았다.
심각한 두통으로 인해 둠의 곁을 끝까지 보좌하지 못했으며, 닉의 마지막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다. 아마 닉은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쓰레기장에 버려졌을 것이다. 아니면 판타스틱 포 때처럼 그의 시체를 성 앞에 전시해놓았을 수도 있다. 토니에게 물어보면 답을 알 수 있지만 제 심신의 안정을 위해 묻지 않는다.
또 한 명의 사람도 떠올랐지만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자신으로 인해 울부짖던 그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나타샤는 자신과 그들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 계기를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저가 둠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들을 잃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둠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명예롭게 그들의 사람으로 죽었을 지도 모른다.
“……로마노프가 나았을까.”
“응?”
토니는 상념에 잠긴 나타샤를 보곤 태블릿을 껐다.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그녀가 말해주길 기다렸다. 토니가 기다리다가 시간을 확인하려고 할 즈음, 나타샤가 입을 열었다.
“가끔 나타샤 로마노프일 때가 그리워.”
“그래?”
“물론 지금이 좋긴 해. 그 덕에 난 목숨을 구한 건 맞아. 하지만……. 이렇게 내 감정을 죽이며 사는 삶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야.”
“나타샤.”
눈물이 보이지 않지만 토니는 나타샤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깨를 약하게 토닥이며 계속 이어지는 푸념을 들어주었다. 오늘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으며,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못해 슬프다는 그녀의 마음을 듣게 되었다. 그 슬픔의 깊이는 저가 헤아릴 수 없다.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청자가 되어주는 것 밖에 없다.
“스타크. 난 어쩌면 좋을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잘 모르겠어.”
토니는 자신에게 둠의 존재는 무척이나 크기 때문에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그녀의 부재가 둠께 영향이 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나타샤에게 미안할 정도로 이기적이지만 제게 가장 중요한 이는 둠이므로.
“나타샤 넌 둠이 미워?”
“……아니. 그는 그의 일을 한 것뿐이니까. 지금까지 나도 그의 부하로, 신부로 있으면서 그에게 해가 될 인물들을 많이 처단해왔잖아. 내가 자발적으로 한 일인데 밉다고 말하긴 어렵지. 굳이 말하자면…”
나타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으며 그녀의 눈동자는 혐오를 담았다.
“…내가 미워.”
토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떤 심정으로 말해주는 것인지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자신은 그녀가 아니다. 쉴드를 위해 일한 적이 있고, 현재 둠을 위해서 일하는 그녀에게 많은 갈등이 있을 거라고 판단될 뿐. 평소에는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아까의 전투가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토니는 마지막에 도망치던 요원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 그녀를 친근하게 부르던 사람이 있었지. 어쩌면 과거에 그녀와 함께 활동하던 사람 중 한 명일 지도 몰라. 그녀가 아끼는 사람.
이런 저런 추측을 해보며 나타샤의 말을 계속 들어주었다.
“스타크 너도 알겠지만 난 닉 때문에 죽을 뻔했어. 하지만 아까 전부터 드는 생각이 있어. 만약 그때 내가 다른 판단을 했다면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어떤 삶을?”
“그날 총을 맞지 않고 빠르게 다른 판단을, 결정을 내려서 살았다면 말이야. 어쩌면…….”
나타샤는 말을 흐리다가 끝내 무엇을 생각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토니는 그녀가 지금과는 다른 길을 생각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지금과는 다른. 제 인생에 있어서의 갈림길은 오직 사느냐 죽느냐 뿐이었기에 선택할 수 있는 나타샤가 부럽다.
난 그가 없었으면 죽었는데. 시간이 지났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선명한 묘사가 가능할 정도로 당시의 사건은 충격적이다. 가끔씩 꿈에서 둠이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꿈꾼다. 결말은 한결 같다. 폭발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어 죽음이 느리게 다가오는데 그 시간이 너무나도 길어 제 인생을 다시 보게 해준다. 흔히 말하는 주마등이겠지.
“참, 빅터가 너 찾아.”
나타샤의 말은 토니가 과거에 잠기는 걸 막아주었다. 잘못 들은 건지 눈을 껌뻑이며 저를 보는 토니에게 나타샤는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다시 말해주었다.
“내가 여기로 온 이유는 빅터가 스타크, 널 찾아서야.”
“뭐?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토니는 당황해하며 시계를 보았다. 나타샤가 온 지 30분이 넘어가는 때라 허둥지둥 준비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왜 둠은 자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건지. 자비스를 통해 연락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데 둠은 고집하며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자신만 사용한다.
“토니.”
아쉬워하며 방을 나서려는데 나타샤가 붙잡았다. 평소라면 불리지 않을 호칭이 들려 토니는 가볍게 웃어주지 못했다. 진지하게 듣고 있다는 의미로 환한 얼굴 대신 감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넌 그에게 마음을 뺏기지 마.”
나타샤는 자신이 감정적으로 둠에게 매여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결혼 관계일 뿐인데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마음속에 다른 이를 품어도 둠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힘들 것이다. 자신이 그로 인해 안 좋은 일을 겪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런 일이 없을 테니 더 문제지. 나타샤는 토니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는 둠의 오른팔이지만 가볍게 일관하는 태도 탓인지 둠을 절대적으로 믿는지 의문이다. 실험할 때는 배너와 달리 방정맞은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물론 저를 포함한 여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게 대해주지만 이건 충성과는 다르다.
충성하기 때문에 둠의 곁에서 일하는 거겠지만. 나타샤는 자신의 걱정이 쓸데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저보다 둠에게 쉽게 헤나길 바란다니. 제 일이나 잘 하지. 멍청하다고 생각하려는데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걱정 마.”
토니는 눈웃음을 지어주곤 방문을 닫았다. 어두운 복도를 거닐다 나타샤의 말을 되뇌었다.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마. 곱씹어 볼수록 재미있는 말이다. 누가 누구에게 하고 싶은 말인데. 저보다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또 존재할 거라고 상상도 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색다른 느낌이다.
“내가 잘 감추긴 하나봐. 스파이 일인자도 모르는 걸 보면.”
어느 새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토니는 노크를 하곤 답을 기다렸다. 곧 안에서 들어오라는 명령이 들렸다. 문을 열자 창문을 등진 둠이 보였다. 그의 등 뒤로 빛나는 태양 때문에 그가 빛나 보인다. 성서에 나올 법한 이미지라 정말 그가 신이 아닐까 고민했다.
아까 나타샤에게 하지 못한 답이 있다. 아마 죽음을 앞둔다 해도 제 입으로는 절대 꺼내지 않을 말이다. 그러니 속으로 재차 말한다.
저는 이미 그에게 마음을 준 지 오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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